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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

김정호 대동여지도 청구도

 

문헌기록과 실물자료들이 조선에서 수많은 고지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알려진 것은 김정호의 지도이다.

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가 조선 지도학의 다양한 성과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에 대하여 알아보자.

청구도(1834)는 김정호가 만든 가장 이른 시기의 조선 전도다. 지도책 안쪽에는 모눈이 없지만, 도엽의 주변으로 10리 간격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숫자를 세어 보면 지도책의 한 면이 가로 70, 세로 100리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로 22, 세로 29층 안에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그려 넣었으므로 동서는 1,540(70×22), 남북은 2,900(100×29)가 된다. 사용자는 상하 두 권의 책을 잇대어 가면서 보면 넓은 범위 안에서 자신의 목적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목적지 인근에는 해당 군현의 사회경제적 현황이 기재되어 있다. 이 수치들은 1828년의 통계치다.

김정호의 청구도범례에는 이 지도를 수정해 나가기 위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다.

첫째, 지도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범례에 따라 지도와 지리지를 작성해서 통합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정부가 지도와 지리지 제작에 관한 원칙을 지방군현에 제시해 두어야 한다. 청구도수정을 위한 원시자료로서의 군현지도는 청구도에 그려져 있는 해당 군현 부분을 베껴 그리는 방식으로 마련하여 각 군현에 내려보낸다. 각 군현에서는 이 도면을 다시 베껴 그린 뒤 그 위에 변화된 지리정보를 기재한다. 지도식(地圖式)은 각 군현에서 지도를 베껴 그리는 데 필요한 통일적인 지침이다.

둘째, 지리지 편찬을 위한 통일된 원칙도 제시되어야 한다. 그는 지리지에 어떤 항목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서술의 밀도는 어느 정도로 유지되어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규정해 두었다.

군현지도가 12방위에 의해 제작되는 것처럼 지지도 12방위로 구분된다. 청구도는 지도와 지리지에 관한 유기적이면서 통일적인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새로운 지도였다.

청구도가 김정호의 의도대로 수정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관찬지도 및 지리서 제작을 위한 청구도프로젝트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물론 지도와 지리지를 하나의 세트로 하여 유용한 지리정보체계를 구축하고 싶어 했던 그의 의지마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청구도이후에도 그의 저작활동은 계속되었다. 최성환과 여도비지(輿圖備志)를 펴내는가 하면, 동여도지대동지지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호를 김정호이게 만드는 것은 역시 대동여지도. 1861년에 처음 완성된 이 지도는 1864년에 다시 간행되었다. 대동여지도는 지도가 새겨진 나무판, 종이에 인쇄된 지도책을 모두 일컫는다. 병풍 모양으로 접히는 22권의 책을 가로방향으로 펼쳐서 위아래로 모아 놓으면 660cm에 달하는 대형 조선 전도가 완성된다. 이것이 대동여지도.

지도의 맨 위쪽 오른쪽 끝 면이 제1책의 첫 면이다. 지도의 표지에 해당하는 이 면에는 일반적으로 제목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발행연도(1861), 저자고산자(古山子)가 표시되어 있다. 1책의 나머지 면들에는 지도해설지도유설(地圖類設), 각종 통계, 서울지도, 축척표(방격표), 지도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방격표는 지도 한 면이 10리 간격 모눈이 가로로 8. 세로로 12개가 들어 있는 크기임을 표시한 것이며, 지도 표는 대동여지도에 사용된 22종의 각종 기호를 기록해 둔 것이다. 이 기호들은 한정된 지면 안에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 산줄기와 물줄기를 표현한 방식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우리나라 고지도 제작자들은 산들을 하나의 줄기로 이어서 표현해 왔으며, 또 아무리 낮고 보잘것없는 산줄기라도 큰 물줄기와 관계되었을 때에는 과장해서 묘사하는 전통을 이어 왔다. 백두산에서 시작되는 산줄기를 대간, 정간, 정맥으로 등급화하여 묘사하는 전통도 마찬가지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이런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했다. 물줄기는 하류에서 두 줄기로 이어지다가 상류의 어느 지점에서 한 줄로 묘사된다. 두 줄과 한 줄이 만나는 지점은 뗏목이나 배가 다닐 수 있는 종점에 해당한다.

도로는 실제와는 달리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위로 10리마다 점이 찍혀 있는데, 그 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평야지대나 하천을 따라가는 곳에서는 지도 상의 평균간격(2.5cm 정도)으로 유지되는 데 비해, 산간도로에서는 10리 간격이 급격하게 좁아진다.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이 간격 차이 안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가 담겨 있다. 여행자는 좁은 간격의 10리 표시를 보고 산간에 가파른 도로나 굽은 도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등고선이 없는 지도이지만, 등고선을 대신할 만한 여러 보완장치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대동여지도에는 군현별 경계가 점선으로 그려져 있어서 자료적인 가치를 더한다. 양천처럼 지금은 없어진 군현이나, 양주처럼 변화가 심한 군현들의 영역이 조선시대에는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점선들을 따라가다 보면 수원이나 광주처럼 내륙 군현의 영역이 서해안까지 뻗쳐 들어간 경우도 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바다가 고속도로였던 시대에 내륙 군현들이 해안에 기지를 가져야 했던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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