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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

서재필 독립신문 창간

 

개항기 언론인 독립신문의 창간 배경과 대한제국시 대표신문인 황성신문과 대한매일 신보에 대하여 알아보자.

일제의 언론탄압으로 인한 언론사의 폐간과 어용신문이 된 대한매일신보에 대하여 살펴보자

아관파천 이후 국가의 자주독립과 개혁(개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때에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1896~1899)이 창간되었다.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서재필이, 개화 정책에 대한 지지 여론을 끌어내고자 한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발행하였다. 독립신문은 한글판을 통해 대중에 계몽하여 근대화를 촉진하고, 영문판을 통해서는 외국인에게 조선의 실정을 제대로 알리고 홍보하여,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완전한 근대적 자주독립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독립신문한글판은 한문을 읽지 못하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 전용과 띄어쓰기를 실시하였다. 또한 창간사에서 창간의 취지를 밝혔듯이, 정치적 중립의 입장에서 정부와 위정자들에 대한 감시와 비판과 함께 백성들의 공정한 여론을 반영함으로써 정부와 백성 간의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민중들에게 자유민권의식과 자주국권의식 등 근대 의식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독립신문영문판은 최초의 영자 신문으로서, 국내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외국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 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조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유용한 소식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한 각국 외교관들에게 본국에 한국 정황을 보고하는 주요 정보원이 되었다. 또한 일본과 중국의 영자신문에서도 독립신문영문판을 인용하여 한국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공식 기관지는 아니었으나 독립협회의 자주국권 · 자유민권운동을 옹호 · 선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서재필, 윤치호 등 독립신문사 편집인들이 독립협회의 간부로 활동하는 등 두 기관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인데, 결국 독립협회가 해산하면서 독립신문도 점차 쇠퇴의 길을 걸어 폐간되고 말았다.

그 외에 대한제국시기 대표적인 신문으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등을 들 수 있다. 황성신문(1898~1910)은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일간지로 주로 유학자층의 계몽에 앞장섰다. 장지연, 박은식, 남궁억, 신채호 등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대한매일신보 강력하게 비판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그 부당성을 비판하며 개간권 반대에 앞장선 보안회를 지원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조약을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고다.

대한매일신보(1904~1910)는 을사조약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한글신문으로 출발하였다가 1907년부터는 신문을 순 한글, 국한문, 영문 등 세 종류로 발행하여 좀 더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하였다. 영국인 베델이사장, 양기탁이 발행 책임이었으며, 그 외에 신채호, 박은식 등 애국계몽가들이 집필진으로 활동하였다. 신문사 사장이 영국인이었으므로 일제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활발한 언론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고종의 친서나, 의병들의 투쟁을 옹호하는 기사를 게재하고,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보상운동에도 가장 앞장서며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했다.

일제 통감부는 1907년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언론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통감부는 베델의 국외 추방을 시도하거나 양기탁이 국채 보상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협의를 씌우기도 했다. 대한제국 말기 대부분의 민족지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병합과 더불어 폐간되고, 대한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대중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국문 일간지 제국신문, 손병희, 오세창 등이

국한문의 일간지로 간행한 천도교 계통의 만세보등이 국민 계몽을 위한 언론 활동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신한민보, 연해주의 해조신문등 해외에서도 동포들이 신문을 발간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개항기 언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영자 잡지의 출현을 들 수 있다. 독립신문 영문판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와 대한매일신보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미국 선교사가 발행한 코리안 리파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고종의 밀서 외교를 담당한 헐버트의 개인잡지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등이 그것이다.

영자신문의 편집인들은 대부분 한국의 실정을 잘 아는 서양인들로, 대한제국 정부나 개화 지식인들과 교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일본 통감부에 매수되어 강제 병합 이후에는 총독부의 영자 기관지가 된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와 같은 신문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영자지들은 국내외 외국인과 외국 언론을 대상으로 한국의 실정을 제대로 알리고 한국의 주권을 수호하는 여론을 조성하여 국제사회로부터 관심과 지지를 끌어내고자 노력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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