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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

공민왕 반원 개혁정치

공민왕은 반원정책과 새로운 이념을 가진 성리학을 공부하고 관료가 된 신진사대부들을 통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자.

14세기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은 국왕을 마음대로 교체할 만큼 극심한 상태에 있었다. 여기에 원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성장한 부원세력이 각종 횡포를 저질러 정치를 더욱 문란케 하였다. 이들은 천민 출신의 국왕 측근세력, 고려왕과 결혼한 원 공주의 측근인 겁령구, 원의 황실이나 귀족과 혼인 관계를 맺은 가문, 환관과 통역관으로 출세한 경우 등 다양한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원은 요동 지역에 사는 고려인을 통제하기 위해 고려왕실의 인물을 심양왕(1310년 심왕으로 개봉)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치적 필요에 따라서 고려왕을 견제하는데도 이용하였다. 이런한 상황에서 유청신과 오잠 등 친원세력은 심왕 세력과 결탁하여 고려를 원의 지방행정기구인 성()으로 전락시키려는 입성책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충숙왕의 둘째 아들인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고 원의 후원을 입어 1351년에 즉위하였으나. 곧바로 원의 간섭을 탈피하기 위해 몽골풍의 의복과 변발을 폐지하였다. 1356년에는 원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본래 고려의 관제로 환원시켰으며, 내정간섭의 수단이 되는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또한 대표적인 부원세력으로 부정부패를 일삼던 기황후(원 순제의 황후)의 일족인 기철 형제를 숙청하고, 원의 직할령인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하는 등 고려의 자주권을 회복하기위해 반원개혁을 추진하였다.

이후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안팎으로 많은 시련에 직면하였다. 당시 중국은 원의 쇠퇴를 기회로 각지에서 한족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중 하나인 홍건적이 1359년에 원군의 반격을 받아 요동으로 쫓기면서 고려를 침범하였다. 1361년에 홍건적은 재차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켰고 공민왕은 복주(안동)로 피난하였으나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이 홍건적을 격퇴하였다. 1363년에는 부원세력과 결탁한 김용이 흥왕사에서 왕을 시해하려고 변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원이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숙왕의 아우인 덕흥군을 옹립하고자 최유에게 군사를 주어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을 대신 주도하게 하였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권세가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신돈은 과도하게 권력과 친위세력을 확대하여 권문세가와 대립하였고 무장이나 신진 관료들까지 숙청하면서 고립되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인하여 성리학을 장려하고 성균관을 기반으로 이색 · 정몽주 · 김구용 · 이승인 · 정도전 · 권근 등 신진사류(또는 신흥사대부 및 신흥유신)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신돈은 반대파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처형되었고, 오래지 않아 공민왕도 신변의 호위를 위해 설치한 자제위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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