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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

개혁파와 척사파의 주장

조선정부는 1880년대 들어 개항이후 암중모색하던 근대문물의 수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개혁파와 척사파의 주장의 이견으로 인하여 많은 사회적 갈등를 야기하게 되었다.

급진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주장에 대하여 알아보고 개항이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고 이어서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과 차례로 근대적 외교관계를 수립할 무렵, 점증하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위협을 느끼고 낙후된 국내의 정치, 경제적 환경을 개선시키고자 한 정치집단이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실학의 한 갈래인 북학파의 경세치용 사상과 박규수의 개국론을 받아들인 청년 지식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노론 집권 세력의 후예인 이들은 개항 이후에는 이미 일정 부분 근대적인 개혁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던 일본과 청의 영향을 받으면서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개화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백성들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주역에서 따온 전통적 용어이나, 근대 일본의 문명개화론의 영향을 받으면서 서구 근대의 여러 양식을 문명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사상체계였다. 이들은 조선 최고 집권 세력의 자제로서 강고한 전통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선이 처한 대내외적 위기가 심화되자 이를 타개할 방안으로 제국주의 열강이 이룩하였던 근대국민국가 창출을 모색하였다.

대표적으로는 노론 안동김씨의 후예였던 김옥균. 반남박씨의 박영교 · 박영효, 남양홍씨의 홍영식, 대구서씨의 서광범 · 서재필 등이 있었으며, 국왕의 외척 세력이었던 여홍민씨의 자제들과 대대로 고위 관료 및 학인을 배출하였던 집안의 후손으로 김홍집·김윤식·어윤중·유길준 같은 이들도 개화 세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승려 이동인, 탁정식, 중인 변수, 군인 유혁로와 같은 중간 신분층의 청년들도 개화 세력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박규수의 지도를 통하여 해국도지, 영환지략과 같은 청에서 나온 양무 서적을 읽으면서 세계의 사정을 파악하고 서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근대적인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박규수 사후에는 개항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청과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되면서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대적 개혁 정책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조선을 근대적으로 바꾸어 나가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파견된 지역과 각자의 성향에 따라 머지않아 일본식의 개혁 정책과 청국식의 개혁정책을 따르는 자들로 나뉘었다. 전자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과 같은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당시에는 개화당으로 불렸다.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한편 후자는 주로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구하던 자들로서, 비교적 장년층에 해당하였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에 대한 태도와 개혁 방식의 차이에 따라 급진개화파(변법개화파)와 온건개화파(사무개화파)로 분기되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직후 조선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한 뚜렷한 징후는 없었다. 다만 조약 체결 직후 일본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김기수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한 적은 있으나,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 등 서양 열강과 조약을 맺게 하여 러시아 및 일본을 막아내고자 하였던 청국 측의 간접적인 권고였다. 이때 청은 1880년 일본에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에게 조선책략을 건네주면서 미국과 조약을 맺고 러시아를 막아낼 수 있는 국력을 증진할 것을 권고하였다.

마침 개항 직후부터 수신사를 통하여 서구적인 개혁 정책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국왕 고종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청의 근대 기구였던 총리각국사무아문을 본따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어윤중을 대표로 한 조사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이 이룩한 각종 근대적 문물제도를 파악하도록 하였으며, 김윤식을 대표로 한 영선사를 청에 파견하여 서구식의 무기 제조법을 익혀오게 하였다. 이와 함께 군제를 개편하고 일본식의 근대 병제를 차용한 별기군를 창설하였다. 1882년 조선이 처음으로 서양국가와 체결한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 역시 개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부의 급진적인 개화 정책은 조야의 대대적인 반발을 받게 되었다. 위정척사론자들은 서양문물의 수용을 추진하고 있는 개화 정책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고 이에 개화 정책 반대운동에 나섰다. 그것이 1881년의 신사척사운동이다. 당시 조선 사회의 지식 · 지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보수 유생들은 바른 학문을 지키고 삿된 것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론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위정척사론은 흥선대원군 집권기 이항로, 기정진의 척사주전론(삿된 것을 배척하고 싸우자는 논의), 개항 무렵 최익현의 왜양일체론(일본과 서양은 같다라는 논의) 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이었다.

신사척사운동은 특히 당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영남지방의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려 조선책략의 폐기와 개화 정책 추진 반대를 주장하면서 고조되었다. 그러나 위정척사론의 열기는 보수 세력이었던 흥선대원군이, 척사론이 비등한 정세를 틈타 정권을 탈취하려던 안기영 역모사건에 연루되면서 이내 수그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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