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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

흥선대원군 쇄국정책

 

중국과 일본이 서구 열강의 대포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던 무렵 조선사회는 오랜 세도정권으로 인해 왕권이 실추되고 봉건적 수탈이 만연하여 크고 작은 농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1863년 철종의 뒤를 이어 아들 고종을 등극시켜 임금의 살아있는 생부가 된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밖으로 쇄국정책과 함께 안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기존 정치 구조의 타파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 정책과 쇄국정책에 대하여 알아보자.

세도가문이 장악하고 있던 최고 결정기구인 비변사를 혁파하고 종래의 최고 기관이었던 의정부를 복설 하는 한편, 소론, 남인, 북인 등 당시 소외되어 있던 붕당 출신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이와 함께 최고 법전인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문란했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모든 권력을 왕권으로 집중시켜 정치 구조의 안정을 이룩하려고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정치부문의 개혁과 함께 당시 가장 절실하였던 수취 구조의 개혁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양반과 토호들이 조세를 내지 않기 위해 토지 대장에서 누락시켰던 토지를 찾아내어 조세를 부과하고 호포법을 실시하여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거두어 농민들에게만 전가되었던 조세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환곡 대신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조세화되었던 환곡의 부담을 줄이고 구휼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정치 구조의 안정화를 위하여 왕권 강화에 집중한 나머지, 경복궁 중건 공사를 무리하게 진행하여 재정 고갈을 야기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원납전을 강제적으로 징수하고, 실질 가치의 100배에 해당하는 명목 가치를 지닌 당백전을 발행하여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화폐유통구조의 혼란을 야기할 뿐이었다. 이와 함께 지방에서 경제적 폐단을 남기고 있던 서원을 민생 구제와 양반 유생층 억제를 목적으로 철폐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이에 전국의 서원은 600여 개가 철폐되고 47개만이 남게 되었고 이러한 조치는 양반 유생층의 대대적인 반발을 초래하였다.

흥선대원군 정권의 개혁정책은 당시 점증하는 서양세력의 위협과 이로 인한 민심의 동요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삼정문란의 해결과 함께 국방 강화와 군제 개혁에도 나섰다. 대표적으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처우를 개선하는 등 수군을 강화하고, 조선왕조 건국 초의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원납전의 징수, 당백전의 발행으로 발생한 수익도 경복궁 중건 공사뿐만 아니라 다수가 군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이와 같은 노력은 초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는 하였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깊숙이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횡포를 부리자 당시 평양감사였던 박규수는 화공 작전을 구사하여 이들을 전멸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지적인 소요에서 얻은 작은 승리들은 흥선대원군 정권으로 하여금 사양 세력에 대한 파악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말았다.

프랑스는 조선에서 천주교 탄압이 일어나 자국 신부가 살해당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로즈가 지휘하는 군함 7척을 조선에 파견하여 병인양효를 일으켰다(1866). 프랑스군은 처음에 강화부를 점령하여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곧 조선 정부는 전력을 재정비하여 양헌수 부대를 필두로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승리였을 뿐, 서양세력에 대한 근본적인 우위를 확인하거나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독일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1865년 영국 상선 로나호에 승선하여 조선과의 통상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뒤 이듬해 다시 엠페러호로 재입국하였으며, 1868년에는 차이나호로 3차 입국하여 남연군묘 도굴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배외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어서 미국도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배상금 지불 요구와 통상개방을 명분으로 18715척의 군함과 1,200명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확연한 화력의 차이로 인하여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 다수가 광성보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상태에 빠졌으며, 미군의 피해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정권은 패배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서양 세력에 대한 항전 태세만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태도로 인하여 흥선대원군 정권은 보수 양반 유생들로부터 일시적인 지지와 환영을 얻을 수는 있었으나, 향후 점증하는 서양 세력 및 일본의 군사적 공세에는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취약함만을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정책은 흥선대원군이 하야 하면서 함께 종식되었다. 최익현을 필두로 한 유생들이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토목사업과 서원철폐를 공격하며 대원군의 하야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마침 친정의 기회를 살피고 있던 고종은 유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흥선대원군 정권은 집권 10년 만에 무너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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