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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보

동학농민운동 전개과정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문호개방을 반대하는 척사운동을 억누르고 부국강병을 위한 문호개방과 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구식군인의 봉기 이후 개화정책이 후퇴하고 한반도는 조선을 속국화한 청과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는 일본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이후 정부 안에서는 개화 방법을 둘러싸고 동도서기론과 급진 개화파가 대립했고, 이는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지지부진 하는 가운데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인 동학은 민중 속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갔고, 반봉건 · 반침략을 지향한 민중 항쟁은 1894년 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런 일련의 개항 이후 정국은 청일전쟁으로 일단락되었다.

동학의 성장과 교조신원운동

19세기 들어 조선에 찾아온 내 · 외부적 위기는 흥선대원군 정권의 개혁 정책으로도 문호개방 이후 전개된 개화 정책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은 점점 더 치열해졌으며, 그 중에서도 청과 일본의 침탈이 두드러졌다. 여기에 흥선대원군 정권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조세수취 구조의 모순은 농민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대항하여 1880년대 들어 군현 단위에서 농민들이 일으키는 민란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 민란들은 군현 단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국지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왕조 통치체제 전반을 변혁시킬 만한 움직임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는 동학이라는 보편사상과 이를 매개로 한 전국적 조직과의 결합을 통하여 비로소 극복할 수 있었다. 동학은 1860년 경주 지방의 몰락한 양반의 서자인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서, 서학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에 대한 의기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핍박 받던 많은 민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왕조 봉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기존 유교적 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으로 지목되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최제우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864년 대구 감영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학은 밖으로는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평등사회를 원하는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이념이었기에 최제우가 즉은 뒤에도 2대 교조 최시형의 포교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동학교단은 1871년 이필제의 난에 휘말려 한때 큰 위기를 겪었으나 이후 강원도 내륙 지역을 본거지로 삼으면서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1880년대 후반 들어 충청도 보은 지역에까지 세를 확장하였다. 이때 전라도 지방의 변혁지향적인 인물들, 이를테면 전봉준과 같은 인물들도 동학교단에 가담하여 호응하기도 하였다.

교세가 이와 같이 확장되자 동학 교단은 1892~1893년에 걸쳐 공주, 삼례, 서을 등지에서 정부를 상대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8933월 금구집회에서 전봉준, 서장옥과 같은 변혁지향적인 세력들은 척왜양구호를 정면으로 내걸어 조선왕조 정부에 대한 대결의식을 표면화하였다. 같은 시기 동학교단의 주도로 열린 보은집회에서도 척왜양창의’, ‘보국안민이 거론되면서 전국적인 봉기가 가시화되기도 하였다.

1차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

금구집회를 주도했던 전봉준은 다시 원래 거주하던 전라도 고부로 돌아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마침 고부 지역은 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인하여 이 지역 농민 대다수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조병갑이 만석보를 지으면서 농민들로부터 정도 이상의 수세를 걷어가자 농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기회 삼아 189311월 사발통문을 돌려 농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하였다. 다음해인 18941월 조병갑의 고부군수 재부임을 계기로 전봉준 주도하에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를 부수어 조병갑의 학정을 전면적으로 무너트렸다. 그러나 이윽고 박원명이 신임군수로 부임하여 회유책을 펴는 한편, 나머지 고을에서 큰 호응이 일어나지 않자 민란은 이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민란 가담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면서 농민 봉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이용태의 폭거에 분노한 농민들은 다시 전봉준을 중심으로 새로운 봉기를 모의하게 되었다. 이들은 같은 해 320일 전라도 무장에서 손화중 세력과 합세하여 자신들의 뜻을 알리는 창의문을 포고하였다. 1차 동학농민전쟁의 시작이었다.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곧바로 진격하여 고부를 다시 점령하였으며, 325일경에는 고부민란 단계에서 진을 치기도 했던 백산으로 이동하여 각지에서 참가한 농민군으로 진영을 확대 개편하였다. 또한, 백산에 설치된 호남창의대장소명으로 격문을 발표하여 농민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고, 농민군 4대 명의와 12개조 기율을 발표하여 군율을 정하였다.

이에 크게 놀란 조선 정부는 전라감영군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농민군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47일 정읍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대파하였다. 이윽고 전라도 서남해안으로 기수를 돌려 흥덕 · 고창 · 무장 · 영광 · 함평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423일 장성 황룡에서도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 선발대를 격파하였다. 결국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4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여 수도 한성으로 가기 위한 1차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진압과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핑계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으로 들이닥치자 국면은 곧 뒤바뀌었다. 정부군은 청 · 일 양국군의 철병을 위해서라도 농민군과 타협해야 했으며, 농민군들도 정부군과의 힘겨운 전투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이에 호응하였다. 57일 동학농민군은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해산했다. 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자신들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각 지역 군현에 설치된 집강소를 중심으로 농민들은 폐정개혁을 차례로 실현해 나갔다. 탐관오리, 횡포한 부호, 불량한 양반을 엄징하고 노비문서를 소각하는 한편, 천민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고 과부의 개가까지 허용하고자 하였다. 이 외에도 무명잡세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고, 문벌을 타파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촉구하여 정치 · 경제부문의 개혁에도 착수하였다.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하여 토지소유부문에서의 평등한 권리를 누릴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차동학농민운동 전개과정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 활동이 한창 진행하던 즈음, 일본군은 내정개혁을 핑계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개화파 정권을 출범시켰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함에 따라 집강소 개혁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재봉기를 결심하였다. 결국 9월 동학농민군은 전라고 삼례 봉기를 결의하였다. 이로써 집강소 개혁이 사실상 끝나고 동학농민전쟁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전봉준은 9월 초부터 삼례를 거점으로 하여 동학농민군을 재조직하고 10월에는 서울을 향해 북상을 시작했다. 이때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대가 세 길로 나누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잇따랏다. 특히 1차 동학농민전쟁에서 적극적인 봉기가 없었던 충청도 · 강원도 · 경기도 · 경상도 북부 지방에서도 반침략 항쟁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봉기가 이어졌다. 충청도 보은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동학교단의 최시형도 918일 무력 봉기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손병희를 비롯한 동학 상층 지도자들도 휘하 교도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1015일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류하였다.

논산에서 합류한 이들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1023일부터 25일까지 대접전이 있었고, 118일부터 11일까지 우금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두 차례의 큰 싸움에서 동학농민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분투했지만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이후에도 논산 황화대에서, 김제 금구 · 원평에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원평 전투를 고비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재기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피신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관군과 일본군에 의한 토벌작전에 밀려 대부분 체포당하였다.

이후에도 1894년 말, 1895년 초에 걸쳐 충청도 보은 북실, 전라도 장흥 석대들, 전라도 대둔산 등지를 망라한 전국 곳곳에서 최후의 항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이 조직적인 토벌작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은 당시에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민중의 자각에 의한 전국적 농민항쟁으로서 근대사회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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